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매일미사 묵상글]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인 요한은 부당한 죽음을 변호할 어떤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증언의 삶을 살아온 요한의 사명의 끝은 순교였습니다. 순교는 가장 완전한 증언입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증언하다’는 곧 ‘순교하다’입니다.
어제 주일 복음 말씀은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끝자리에 가서 앉고, 또 우리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려거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같이 우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루카 14,7-14 참조).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공교롭게도 첫자리에 앉으려는 이들이 벌이는 잔치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 잔치는 임금인 헤로데가 베푼 잔치였고, 여기에 초대된 이들은 저마다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궁궐에서 벌어진 헤로데 임금의 잔치 이야기 다음에 곧바로 광야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잔치를 소개합니다(6,30-44 참조). 이렇게 하여 두 잔치를 대비시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세례자 요한의 잘린 머리로 끝나는 죽음의 식사라면, 이어지는 이야기는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배불리 먹은 예수님과 군중의 생명의 잔치입니다. 이는 삶의 기준에 따라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올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곧 우리의 본보기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누구를 본받아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헤로데의 궁전에는 부와 권력, 교만과 허영, 음모와 계략, 증오와 원한, 불의 그리고 쟁반 위의 잘린 머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광야에는 동정과 연민, 사랑과 친교 그리고 배불리 먹고 남은 빵과 물고기로 가득 찬 열두 광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러 살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정용진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