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9월 21일 수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성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 사도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 참조)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제1독서 에페 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복음 마태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매일미사 묵상글]
세리 마태오는 다른 공관 복음서들에서 ‘레위’로 소개됩니다(마르 2,14; 루카 5,27 참조). 주님께서 마치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듯이, 레위에게 마태오라는 새 이름을 주신 듯합니다. 마태오(그리스어로 마태오스)라는 이름은 히브리 말 이름 ‘마티트야’에서 온 것으로 ‘주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세리였던 그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일은 정녕 주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소명과 응답이라는 이 단순한 장면은 그 자체로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카파르나움(마태 9,1; 마르 2,1 참조)의 세리였던 마태오는 예수님에 관하여 이미 많은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평소에 세리라는 수입이 보장된 직업과 매국노라는 비난 사이에서 깊이 고뇌하며 떳떳하고 기쁜 삶을 살고 싶은 열망을 품지 않았다면, 어찌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하느님의 예언자라고 들어 알고 있던 분께서 죄인인 자신에게 “나를 따라라.” 하셨을 때, 지독히도 원망스러운 그 모든 과거를 온전히 용서받고 새 삶으로 초대받은 그 순간에, 마태오가 느꼈을 전율과 환희가 생생히 느껴집니다.
죄와 부덕함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열었을 때, 탐욕과 억압의 장소인 세관이, 그리고 죄인들과 세리들의 식탁이 하느님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주님과 죄인들을 탓하며 구원의 기쁨에서 스스로 멀어졌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부르심받은 사람답게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와 사랑을 실천하면서’(제1독서 참조) 우리 모두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살아갑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이메일을 통해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조금 난감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분을 알지도 못하고, 또 그 상황도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 분은 몇 년째 저의 묵상 글을 보고 있다면서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또 갑곶 성지 초창기에 자주 왔었다고 말합니다. 역시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를 잘 알고 있으니, 도움을 당연히 줘야 하는 것처럼 메일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냥 무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분을 모르니까요.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친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필요할 때만 연락하고, 친구의 연락에 대해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그 친구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다고 하더군요.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을 때도 깊은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면서 필요한 것을 얻기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과 이기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도 이런 모습을 취했던 우리는 아닐까요? 필요할 때만 기도합니다. 과연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관심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보여주신 표징과 힘이 되는 말씀은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가능성을 갖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줄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요. 그래서 계속해서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표징을 보여주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필요한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변화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리들과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많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실천만을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실천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기 필요한 것만을 계속 청하고만 있는 우리가 아닐까요?

주님께서 부르는 사람은 능력 있고 재주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을 지금 부르십니다.